걷기

중학교 2학년 시절 아마도 가을이었나 보다. 동두천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소요산으로 소풍을 가게 됐는데, 의정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대충 40여분이 걸렸다. 사실 소풍이라는게 고단한 일주일에 두 번의 안식일을 갖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아니나 다를까 대충 점심 먹을 때 즈음 학년주임 선생님께서 소풍 일정이 다 끝났으니 너그들은 알아서 돌아가라고 공지하셨다. - _ -; 아마도 선생님들은 따로 음주의 파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때 시간이 아마 정오를 갓 넘긴 12시 20분 쯤이었을 것이다. 약간 허무하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남았고... 기차로 40분 정도 걸렸으니까 흠.. 까짓거 집까지 함 걸어보자!는 야심찬 계획이 떠 올랐다. 기차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면 양주군이 나올 것이고 더 걷다보면 의정부가 나올 것이니 별로 복잡할 것도 없었다.

우선 애들을 꼬시기 시작했다. '모처럼 학교를 벗어나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는건 말도 안된다. 하루가 아깝고 오늘의 이 화창한 날씨가 아깝다. 너희들은 평생을 가지고 갈 추억을 바로 지금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라며...약장수의 비논리에 아이들은 하나 둘 모여 급조된 패거리는 무려 20여명에 육박했다. 동지들은 무척이나 고무 돼 있었으며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한 번은 기차에 치일 뻔 했고 두 번은 무서리에 성공했으며 한 번은 호박서리도 성공했다! 특히나 무서리는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짜식이 국어 시간에 안졸았다고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무를 뽑아 먹는 장면을 동지들에게 주입시키고 행동에 옮긴 것이다. 몰래 침투 해 무 하나를 뽑기 전까지의 긴장과 서스펜스! 그 달고 매웠던 무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생각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예상 시간 2시간(어림도 없는 철 없던 중딩의 주먹구구식 계산)을 훌쩍 넘기도록 우린 동두천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친 동지들은 하나 둘 현실과 타협을 시작했다. 배는 고프고 힘은 들고 바로 옆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싱싱 날라다니는데 오죽했겠는가.... 배신자들 ㅠㅠ


한참을 걷고 걸어 양주군을 가로지를 무렵 해는 떨어지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동지들은 나를 쳐서 딱 4명만이 남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모하게 일을 벌린 죄책감과 동지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내가 생각했던 것은 '노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풋풋하고 귀엽게(-_-) 느껴진다.

해 떨어진 차도 갓길로 까까머리를 한 네 명의 중학생들이 비를 맞으며 1열로 걷고 있는데 다 같이 '교가'를 부르고 있다;;

기껏 생각해낸 노래가 왜 하필 교가였을까 - _-;; 지금도 의문이다. 아무튼,

8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걸어 본 적이 없어 몸도 많이 놀랬었나 보다. 그 즈음에 열꽃이 몸에 피었었는데 집에 와 보니 매우 심해진 상태였고 보도블럭 턱에 다리를 올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지난 주 토요일. 서울의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구름 한 점 보기 힘든 새파란 하늘은 그림과도 같았다.

토요일이었지만 중간고사를 보는 관계로 학교에 나가게 됐던게 시발점이었다. 2시에 시작된 시험은 30분을 갓넘기고 끝나게 됐고 전철역으로 향하다가 하늘을 보니 모지게도 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홍익대학교부터 '한강을 건너보자'는 생각으로 강쪽으로 내려 걸어갔다. 강변을 따라 난 길로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오케 합류하는거야! 즉흥적으로 시작된 만큼 카메라라던가 복장에 있어서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강 건너 여의도가 보인다. 국회의사당과 63빌딩, 쌍둥이 빌딩.. 멀리서만 봤던 건물들을 오늘은 가까이서 보리라! 잠깐 걷다 보니 여의도로 연결된 다리가 보인다. 마포대교란다. 예압 건너는거야! 모진 강바람에 가르마의 방향은 바뀌어 흉몰스런 몰골이 됐지만 무언지 모를 가슴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바람에 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난 상쾌하게 미쳤었다.

여의도를 대충 훑어보고 전철을 탈까 잠시 생각하다가 평소 꿈꾸던 '한강 횡단의 계획'은 바로 오늘을 위함임을 깨닫고 다시 걷기 모드로 변신! 한강 시민 공원길을 따라 동으로 동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충 이러한 루트


걸으면서 또 다른 목적을 정했다. 모교 보다 더 모교 같은 세종대학교를 가서 친구녀석한테 저녁을 얻어 먹자! 홍대는 서쪽이고 세종대는 동쪽이니 대충 한강 횡단 계획에 들어 맞기도 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남산타워에는 어느 덧 조명이 켜지고 서쪽을 바라보니 여의도 뒤편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뻤다. 근데 추웠다;;

평소 전철로만 다녔던 곳을 막상 걸으려니 촌놈이 길이 헷갈릴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지도도 없고 해는 떨어졌고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난리가 났다. 그래도 걸었다. 저기 멀리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 사람이 건널 수 있게 생겼다. 압구정으로 가는 이정표를 보고 대충 이 다리를 건너면 되겠구나 싶어 무작정 건넜다. 또 다시 강바람은 나의 가르마를 제멋대로 흩뜨려 놓았고 3시경의 상쾌함과는 달리 비참한 집 나온 강아지 꼴이 되었다.

이런! 다리를 잘못 건넜다. 광진구로 건너고자 하는 계획은 촌놈의 무지로 성동구로 건너게 되었고 나오라는 세종대학교는 없고 한양대학교를 만나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잠시 끽연의 시간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던 중 보게 된 '어린이 대공원' 이정표였다!

흠헤헤. 신이 났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발이 살살 얼은 것 같으면서 촉촉히 젖은 듯한 그 느낌은 행군때나 느끼는 것이었는데;;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저기 멀리 건물 외벽에 SEJONG이라는 반가운 글자가 보였다. 쵝오! 쵝오! 난 해냈어!

다음 번에는 도봉산에서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종단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데.. 동참 하실분 손손!!

by zral | 2005/10/28 17:40 | & so on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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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자유 at 2005/10/29 15:16
교가라니... 애교심이 강한 학생이셨군요. ;)
Commented by 명진양 at 2005/11/01 23:51
그래서 또, 걸었다. 나 홍대 놀이터앞으로 이사했수. 야호.
Commented by zral at 2005/11/02 03:42
놀이터 앞에 주택이 있더냐? - _-?
Commented by zral at 2005/11/02 03:43
애교심..... 네 뭐. 애교심.. 네 뭐. 지나간 옛 이야기죠. ㅡㅜ; 다신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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